이 흥 우
李興雨齒科 院長, 哲博
새벽에 깨어 보니 5시 20분이다. 호텔 노천탕이 지금 하려나? 5시 반에 문 열면 좋겠다고 생각하며, 7층까지 엘리베이터를 타고 엊저녁 갔던 온천탕으로 올라갔다. 잠결인가? 어제 왼쪽으로 들어갔었지? 목욕탕 입구에 슬리퍼가 하나도 없다. 내가 첫 번째인가 보다. 어제도 사용했던 6번 사물함을 열고, 걸치고 있던 목욕 가운을 벗어 집어넣곤 분홍색 열쇠로 잠갔다, 탕엔 아직 아무도 없다.
어, 그런데 분홍색 열쇠라니? 순간, 여탕인가 하는 생각에 번뜩 놀라, 얼른 속내의를 다시 입고 허겁지겁 가운은 손에 든 채, 욕탕 출입구 문을 밀치고 밖을 둘러본다. 이크, 바로 옆에, 남탕 출입구를 표시하는 푸른 천이 펄럭인다. 냉큼 가운을 걸치고 바로 옆 남탕 출입구 문을 열고 들어간다. 이번엔 6번의 푸른색 열쇠다. 탈의실 옷장을 연다. 휴, 다행히 아직 아무도 오지 않았다.
순간 뇌리에 스친다. 일본엔 혼탕이 있었다지. 하루하루 교대로 여탕과 남탕을 바꾼다는 가십거리 기사를 떠올려 보지만, 그렇다고 여성이 선호하는 분홍빛 열쇠 색깔까지 푸른색으로 바꿀 순 없다. 게다가 주인이 탈의실의 무거운 나무 옷장까지 매일 들어서 교환하는 수고까지야 했겠는가, 혼자 마음을 달래려 슬며시 웃는다, 비몽사몽이라, 출입구 헝겊 천에 女湯이라 쓰여있는 걸 아까 못 보았나 보다. 샤워 끝낼 때까지 아무도 들어오지 않았다. 20분쯤 지나서야 꽁지머리를 한 기모노 입은 한 남성이 들어왔다.
면도하는데 앞 거울에 작은 잠자리 한 마리가 붙어있다. 어찌 들어왔을까? 실내 욕탕과 통해 있는 노천탕의 미닫이 실내문은 하루에도 수백 번 열리고 닫히고, 노천탕의 실외 유리 벽은 항상 반쯤 바깥 공기와 관통해 있다. 그래서 노천탕 유리 외벽의 모퉁이엔 거미줄도 있어 유리 벽 안팎으로 거미가 왔다 갔다 한다. 걸려든 작은 곤충들을 먹이로 붙잡기도 했겠지. 어제는 욕탕에 나뭇잎이 두세 개 떠다니는 줄 알았는데 오늘 보니 작은 나방의 날개였다. 실내 욕탕과 분리되는 노천탕의 칸막이 미닫이문을 닫고 실내온천탕으로 나오다, 문득 욕탕 실내를 맴돌 잠자리가 생각나서 문을 열어 둘까 잠시 멈칫했다. 실내 욕탕에 입욕해서 유리로 만든 건물 외벽을 보니, 내부에서 외부로 나가려는 작은 곤충들이 덕지덕지 붙어있다. 잘못하면 평생 바깥세상을 못 보고 이 안에 갇혀 살지도 모르겠다. 인간사 또한 그렇지 아니한가,
어제 장기표 선생이 돌아가셨다는 비보에 여행 중 마음이 뭉클했다. 한두 달 전 시한부 암 진단에, 살고 죽는 자연(自然)에 순명(順命)하겠다고 담담히 말씀하시던 유튜브 영상을 보았었다. 할 만큼 일했고, 한없이 사셨다고도 했다. 좋아서 한 일이니 받을 수 없다며 민주화운동 보상금을 마다하셨었다. 2020년 4.15 총선의 대규모 선거 조작 의혹에도 강하게 일갈하셨던 선생이셨다. 설마 기계가 오작동하겠냐며 우리가 디지털을 맹신하지만, 못된 인간이 가짜 숫자를 기계에 입력하면 그대로 가짜 숫자가 출력되어, 선거 결과가 왜곡된다. 오도된 여론으로 사람들을 쉽게 선동할 수 있는 세상이다. 선생은 신문명론을 주창하셨고, 잘못된 건 잘못되었다고 똑바로 지적하셨다.
정치꾼들이 2×3=6인데도 7이라 우겨도, 보통 사람이야 사느라 바빠 그냥 세뇌당하기가 십상이다. 그러나 교육자도, 성직자도, 의료인도, 법조인도, 언론인도 아무 소리 안 한다면 그게 어디 엘리트 지식인인가, 바보지. 멍한 언론은 정신 차릴 때까지 끊어야겠다.
욕탕에서 배가 남산만 하게 불룩해진 이를 보곤 조심스레 내 배도 바라본다. 실내에 들어온 나방을 보고 남산을 보는데, 흥에 겨워 춤추던 내 스냅 사진을 딸에게 카톡으로 보내며 장난꾸러기 외손주를 닮았다고 핀잔을 주던 아내 목소리가 욕탕 물에 비친다. “거봐, 할아버지가 신발을 구겨 신어서 자기도 원래 신발은 구겨 신는 건 줄 알았다고 둘러대는 손주 좀 보라고. 못된 버릇이 3대를 가니···.” ‘아니야, 이젠 내가 손주를 닮았다고. 손주가 춤추는 동작을 보고 이 할아버지가 따라서 한 춤이라고···.’
욕탕을 나오며 출입구를 한 번 더 돌아보니 두 개의 문이 나란히 있고, 푸른 천으로 만든 가리개 현수막엔 영어로도 men, 붉은 천 현수막엔 ladies라고 여전히 쓰여 있다.
젊어서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의 천상병 시인을 좋아했다. 마나님이 운영하던 인사동의 찻집 ‘귀천’에서, 손님 없는 소파에 앉아 닳은 앞니를 드러내고 천진하게 웃던 그의 초상화가 떠오른다. 이 땅에 소풍 나왔던 시인의 나비와 선생의 나비는 드디어 하늘로 날아서 돌아갔다.
http://www.chihak.co.kr/news/192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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