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흥 우
李興雨齒科 院長, 哲博
<891호 8면에 이어서>
아, 그래서 기획자가 당시 상황을 고려해 (굳이 식탁을 중앙에 놓고) 전시실 사방의 벽에 그림 4개를 순서대로 걸었구나! 밭을 갈고 밀이 익고 또 추수한 밀이 쌓여있는 봄, 여름, 가을, 겨울의 밝은 색조의 시골 풍경들이 차례로 벽면에 걸려있다. 피사로의 의도뿐만이 아니라, 큰 식당 문 위에 걸어 식사를 활기차게 만들려는 주문자의 요청으로 그림이 그려졌음을 편지는 알려준다.
등 뒤로 피카소의 작품(1923년 作, ‘팔짱을 끼고 있는 서커스 공연자-saltimbanque’)이 걸려있는 거실 소파에서, 소장자이자 집주인인 피아니스트 블라디미르 호로위츠(1903~1989)가 손으로 턱을 괴고 기대어 쉬고 있다. 바로 그 당시의 사진이 지금 전시장 한 벽면에 걸려있다. 피아니스트는 1944년 뉴욕에 5층 집을 사서 2층 거실에 이 그림을 걸어놓고 손님을 초대했다 한다. 몇 번의 소장자를 거쳐 재단이 1980년 이 그림을 사서, 지금은 아티존미술관 기획전시장의 다른 한쪽 벽면에 걸어놓고 있다.
그림 소장자가 피아니스트이냐, 또 집을 방문한 손님이 누구냐에 따라, 그림과 장소와 방문객과 소유주가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다고 기획자는 사진을 통해 설명한다. 장소에 따라 작품의 역할도 달라진다, 피아니스트의 거실에서 손님만 보던 피카소 그림을 지금 아티존미술관에서 여러 관람객이 바라본다. 더욱이 소유주가 선호하는 장소, 특히 애정 어린 손길이 닿은 생활 가구 한가운데에 작품이 어떻게 배치되느냐에 따라, 작품과 공간과 사람이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다는 기획자의 해설이 놀랍다. 피아니스트는 어떤 영감을 받았을까.
어쩐지 전시장 첫 입구에 나무 불상이 둘 있었다. 여러 지역을 순례하며 자연에 사는 붓다를 조각했던 17세기의 승려 엔쿠(Enku)는 오천 개 이상의 불상을 만들었는데, 그중 일부는 사원에 바쳐지고 일부는 여행하며 만난 마을 사람들을 위해 제작되었다고 전해진다. 특히 여기 전시된 목각의 온화한 미소는 마을 사찰에서 풍년을 기도하고 질병 회복을 기원하던 마을 사람들의 일상을 닮았다며, 기획자는 한발 더 나아가 작품과 장소의 연관성을 정리한다. 불상에 기도하며 마음의 평화를 갖듯, 그림을 자기 집에 잘 배치하여 가장 좋은 곳을 만들듯, ‘장소와 작품’이 중재하는 사람에 따라 달라지니, 이전의 모든 정보는 잊고 기획자가 새로 구성한 모습을 보며 새로운 관계를 가져보라고 권유한다. 입구에 메시지가 있었구나!
전시회에서 우리는 무엇을 보는가. 예술에서 우리는 ‘삶을 바라보는 시선’의 하나를 본다. 생명이 무언지, 존재의 본질을 힐끔 본다. 국내에 돌아와 기차를 타고 남녘을 여행하다 멀리 창밖의 산 구릉을 본다. 우리나라 산천의 굴곡도 저리 꿈틀대며 살아있었던가. 남원역 푯말을 지나 차창 옆 기차 레일과 눈앞 아파트들이 스쳐 지나고, 멀리 산등성이를 본다.
대상과 삶을 바라보는 자세는 어떠했는가. 전시회 안내자처럼 경건했던가. 가까이만 보지는 않았던가. 녹색 잎사귀에 따스하게 떨어지는 햇살이 바로 생명이었음을 느끼고 있었는가. 안 보이는 것을 보는 상상력은 늘 자유롭게 날아다녔는가….
아무것도 없는 사막에서 유(有)를 보듯, 홋카이도로 간 예술가는 동토에서 생명을 보았다. 박 교수는 오늘 유난히 희망차고 밝다. 퇴직 후 2년 동안의 야외 햇살과 계곡의 바람이 밝은 색감의 숨을 뿜어주었나 보다. 바라보면서 우리는 ‘바라보는 대상’이 된다.
http://www.chihak.co.kr/news/194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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