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흥 우
李興雨齒科 院長, 哲博
전철역과 가까운 호텔에 묵고 있기에, 레일 위를 달리는 전철 소리에 새벽잠이 깼다. “그래, 맞아. 깊은 땅속에서 울려 나오는 소리였어.” 꿈결에 눈을 비빈다.
어제 늦은 저녁, 어둑한 스크램블 교차점엔 수백 명의 사람이 매번 신호마다 홍수처럼 교차로를 가로질렀고, 발을 딛는 소리가 천둥 치듯 인파로 가득 찬 거리를 진동했다. 엄청난 인파의 물결 자체가 시부야 최고의 관광 거리라고 하지만, 어찌도 그리 많을까. 교차로에서 조금 떨어진 고가도로 아래 한구석에선, 비좁은 엘리베이터가 기껏해야 서너 명을 지상 2~3층으로 힘겹게 끌어 올리고 있었다.
아직 잠결이다. 지난밤 TV 뉴스에선 1707년 이후 300년이나 분화를 멈추고 있는 후지산의 축적된 에너지가 언제든 분출할 가능성이 있다며, 기상청은 내년부터 화산재 예보 시스템 개발에 나설 예정이라고 보도했다.
오늘은 도쿄 시부야에서 두 시간 거리에 있는 후지산 주변 가와구치코 역으로 이동할 계획이다. 기차 소리가 또 들린다. 일본에는 수많은 사철과 국철이 얽혀있다. 시부야에선 3개의 전철 노선이 만난다. JR 선과 G 선과 H 선이다. 각 지하철이 교차하는 공유 정거장엔 항상 갈아타려는 인파들로 북적인다. 출퇴근 시간의 발자국들은 매일 매일 쌓이고 쌓여, 오고 가는 전철들과 승객들의 무게만큼이나 땅속 깊이 진동에너지로 움직여 간다. 숱한 발자국들은 살아있는 지구 속의 마그마 흐름에 얼마나 영향을 끼칠까.
새벽이다. 꿈결 속의 아까 그 소리는 분명 살아있는 목소리였다. ‘인간이 만든 기차와 레일과 땅이 부딪혀 울리는 소리’와 ‘원시 지구가 뿜어내는 소리’가 똑같을 줄 누가 알았겠나. 소설이건 수필이건 양식만 다를 뿐 뜻하는 바가 같듯. 소리도, 진동도 원래 같은 것이었음을 어찌 내가 알았겠나.
가와구치코 주변 온천에서 후지산 쪽을 바라보니 하늘이 온통 뿌옇다. 구름으로 가득 찬 하늘 한 모퉁이에서만 햇살이 조금 비쳐 나올 뿐, 산은 보이지 않고 전부 가려있다. 어제는 단 5분만 꼭대기 얼굴을 보여주었을 뿐이라고, 여행 중인 한 사진작가가 찍은 사진을 보여준다.
노천탕을 둘러싸고 있는 돌벽에 양팔을 올려 감싸 얹으니, 이목구비가 뚜렷하게 패인 돌덩이가 뒤의 목을 내어준다. 돌이 되어버린 용암인가. 코가 낮은 불도그를 닮았다. 노천탕 외벽에 쌓인 돌무더기를 하나하나 세어보니 돌덩이가 스물다섯이다. 더 자세히 들여다보니 작은 돌멩이 다섯이 뒤에 숨어있다.
“너 몇 살이니?” 묻는다. 후지산 주변을 맴돌다 혹 몇천 살이 되었을지도 모르겠다. 돌덩이에 움푹 새겨진 눈, 코, 입이 살아있는 개와 똑같다. 왼쪽 팔을 쭉 뻗으니, 납작한 코와 짧은 주둥이가 손끝에 만져진다. 억겁이 지난 암석 30개가 노천탕을 두르고 있다. 돌덩이가 바둑이처럼 보이기까지 참 오랜 세월이 걸렸구나. 이제야 내가 돌의 나이를 묻고, 돌이 제 나이를 보여주다니….
사진작가가 보여준 후지산에 걸친 구름처럼, 호텔 로비에 비치된 텔레비전 모니터에선 후지산의 기묘한 구름 영상들이 순간순간 바뀌고 있다. 내일 아침엔 햇살이 구름을 밀쳐 올려, 후지산의 얼굴을 볼 수 있으려나.
카톡이 울린다. 초등학교 친구가 만나자는 메시지를 보내왔다, 문득 그가 추억의 우물에서 어느 두레박을 올렸을까? 우리는 가슴 속에서 향수를 끌어 올리고, 시부야 교차점의 발자국들은 살아있는 지구의 용암을 움직인다. 지구 진동에 맞추어 심장도 뛴다지만 잠결에 지축의 진동은 못 느끼고 기차 소리만 들은 채, 카톡 문자 너머 ‘땅의 울림’을 다시 한번 되새겨본다.
http://www.chihak.co.kr/news/195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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