뿔뿔히 흩어져 무사히 38선을 넘은 가족들 서울 약수동에 정착
김 영 수
서울대명예교수
38선 넘어
여름이되어 몹시 더운 어느날 저녁 날이 어두워 오자 가족을 두명씩 나누어 어머니와 나는 건장한 청년 두 사람을 따라 어디론가 남의 눈에 뜨이지 않게 조심 조심 이동하기 시작했다.
동산 같은 데를 지나 산속으로 들어가 불켜진 경비 초소를 지날 때에는 숨죽이고 기어가기도 했다. 다음은 바지를 걷고 해변 같은데도 걷고 내가 잘걷지 못할때에는 짐을 진 안내원이 나를 번쩍 들어 짐위에 얹어 업어 주기도 했다.
드디어 새벽녘이 되어 어떤 시골집 같은데에 데려다주고 지쳐 쓰러진 내 어머니에게 뭔가를 달라고 했다.
그것은 머리빗이었다. “아주머니 정신 차리세요 약속한 물건을 주세요” 소리 쳤다. 이들은 남한에 난민을 데려다 준 징표로 미리 가족과 약속한 물건을 가지고가서 안내비 를 받는다. 우리의 경우 그것은 어머니의 머리 빗 이었던 것이다. 그 집의 위치는 당시 남한에 속한 “청단”이란 마을 이었다. 우린 사전에 아무에게서도 미리 듣지 못했지만 어머니와 난
간밤에 38선을 넘어 아르바이트 안내원을 따라 남한에 온 것이다.
이내용은 비록 짧지만 요즈음 탈북민들이 중국과 동남아를 거치는 과정과 흡사할 것으로 추 측된다.
그리고는 집안으로 들어가 이번엔 대기하고 있던 남한 요원들의 심문을 받기 시작했다. 그곳에는 다수의 난민들이 있었다. 아직도 기억에 남은 질문은 “너의 어머니는 여성동맹위원회에서 일했지?” 등의 가족에 대한 질문이었다. 아니라고 하니까 어린 나에게는 더이상의 질문은 없었지만 분리 심문이어서 어머니에게는 무엇을 물었는 지는 모른다.
개성 피난민 수용소
날이새자 우리는 가져온 두궤짝의 짐과 함께 트럭에 태워 개성 피난민 수용소로 보내졌다. 넓은 운동장에 흰색 대형 천막이 가득 세워진 천막촌이었는데 한 여름철이어서 천막속은 매우 무더웠다.
이때 요원들이 소독 펌프를 들고와 옷속에 디디티를 뿌리 주었다. 아주 시원한 느낌이었다. 6.25 전쟁 기록영화에서 흔히 보아온 장면을 경험한 것이다.
모든 것은 무료로 시행되었는데 배가 고픈 시기여서 제공받은 음식이 기억난다. 보리밥과 미 군 소고기 통조림을 풀어 만든 짭짤한 소금국이 전부였다. 고기는 보이지 않아 한때 군대생활을 표현할 때 쓰는 말 ‘소가 장화신고 지나간 그런 것’이었다. 그래도 감사하면서 먹고 한달을 그곳에서 지냈다. 그간 남한에 연고자가 있는 경우는 찾아 연결을 해 주었다.
드디어 입경
서울에 사시는 고모에게 연락이 되었다는 사무소의 통지를 받았다. 그다음 날인가 수용소에서 마련해준 트럭을 타고 목적지인 서울로 왔다. 서울역 광장에 어머니와 나를 내려주고 트럭은 수용소로 되돌아갔다. 이제부터는 자비로 이동해야 한다. 당시 서울역에는 역마차가 요즈음 택시 역할을 했다. 그역마차를 타고 고모가 근무하던 돈암동 성신여고로 갔다. 동경국립 음악학교에 유학하고 그곳에서 음악교사를 하고 계셨었다. 고모님이 마련해둔 약수동 373-305번지는 내 새로운 본적지가 되었다. 가족 모두 무리짓지않고 이인 일조로 분산 해서 월남했다. 누나 같은 고모 둘은 나와 같은 코스로 오다가 잡혀 투옥되 고생을 하고 재 탈출을 했고 조부모님은 친척의 어선을 이용해 많은 짐도 가지고 올수 있었다고 들었다. 후에 장성으로 전역하신 삼촌은 신의주 학생사건때 개인적으로 월남하신 것으로 알고 있고 뿔뿔히 흩어졌던 우리 가족 모두 이집에 모여 살게 되었다.
청구 국민학교 시절
38선을 넘기쉬운 계절을 택하다보니 그시기는 여름방학때여서 학교를 갈수 없었다. 학교에서는 학기중에는 교과서를 제공할수도 없고 중도에 따라가기도 어려울테니 신학기부터 다니라고해서 4학년부터 다니게 됐다. 가까운 장충국민학교는 자리가 없다고 해서 청구로 가게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