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림(성흥)산성과 대조사 <2>
기 태 석
대전·기태석치과 원장
가림성이 있는 성흥산 중턱에는 대조사라는 자그마한 절을 만날 수 있는데, 지금은 마곡사의 말사로 되어있지만, 이 절은 높다란 석축만큼이나 고귀한 사격寺格을 지니고 있다. ‘사적기’에 따르면 527년 성왕 5년에 담혜라는 스님이 세웠다고 되어있지만, 또 다른 ‘대조사미륵실기, 부여읍지’에는 백제 불교를 중흥시킨 겸익이 세운 것으로 되어있다. 두 기록 모두 6세기 초에 세운 천년 고찰이라고 기록될 만큼 오래된 사찰이다. 석축 사이로 난 돌계단을 오르면 정면에 원통보존과 삼층석탑이 나오고 뒤로 오르면 대조사 석조미륵보살입상이 동쪽을 바라보고 서 있고 그 앞에는 용화보전이 있는데 이곳은 내부에 불단을 만들지 않고 뒷면을 유리로 처리해서 뒤로 보이는 석조미륵보살을 주존불로 모셨다. 그 외에 명부전 산신각, 범종각, 우물인 불유정, 요사채 등의 전각들이 있다. 대조사는 성흥산성을 방문하면 반드시 거쳐야 하는 고적답사의 필수처가 되고 있다.
 |
원통보전 뒤쪽에 보이는 파란 방수포는 이번 여름(2024년) 산사태로 무너져 내려 불유정 등이 피해를 입었다. |
대조사 창건설화
전설에 따르면 501년 우리나라 최초로 인도로 유학갔다 불경을 가져와 백제 불교를 발전시킨 겸익 스님이 큰 바위 아래서 암자를 짓고 살았는데 참선 도중에 깜박 잠이 들었는데 기이한 꿈을 꾸었다. 커다란 새 한 마리가 서쪽에서 날아와 온몸으로 황금빛을 뿜어내며 현재의 대조사가 있는 곳으로 내려앉았다. 그리고 큰 바위를 향해 계속 날개짓을 하자 한 줄기 빛이 바위를 비추더니 그곳에 관세음보살이 나타나셨다. 겸익 스님은 꿈에서 본 관음조觀音鳥와 관세음보살을 친견한 큰 바위에 미래에 오실 미륵불상을 조성하고 불상을 세웠다. 그리고 절 이름을 큰 새(관음조)가 나타난 절이라는 뜻으로 대조사大鳥寺라 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조성 양식으로 보아 미륵불상은 고려 초기에 조성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대조사 석조미륵보살입상(보물)
부여 대조사 석조 미륵보살입상은 대조사 원통보전 뒤편에 있는 거대한 보살상이다. ‘대조사 미륵실기’에 고려 원종(1259~1274 재위) 때 무량사의 승려였던 진정장로가 불상을 수리했다는 기록이 있고 광종(949~975 재위) 때 만든 관촉사 석조 미륵보살입상과도 비슷하여 이 보살상도 고려 전기에 만들었을 것으로 본다. 이 보살상은 커다란 천연 바위 하나에 머리와 몸체를 새겨서 만들었으며 높이가 10m나 된다. 몸체는 뭉툭하고 얼굴이 넓적하고 커서 신체 비례가 5등신에 가깝게 표현된 것이 특징이다. 고려 전기 충청도 지역의 거대한 보살상 제작 전통을 대표하는 불교 미술품으로 유명하다. 대조사 미륵보살입상(보물)은 이웃에 있는 논산 관촉사 미륵보살입상(일명 은진미륵 국보)과 익산에 있는 고도리 석조 여래입상(보물)과 유사한 점이 많은 이 지역만의 특색을 지닌 불상들이다.
미륵보살입상과 소나무
대조사 미륵보살입상과 소나무와의 궁합은 무생물과 생물의 인연이 이렇게도 자연스럽게 이어질 수도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극적인 조화이다. 거대한 바위 틈새로 비집고 뿌리를 내린 소나무가 아름드리로 크게 자란 것도 자연의 신비인데 그 아래 천 년을 이어온 석조 불상이 햇볕에 그을릴까, 파라솔을 펼쳐 음지를 제공한 지 얼마나 되었을까? 그런데 최근 국가유산청 연구에 의하면 소나무잎이 떨어져 화강암에 해가 된다는 연구 결과로 소나무 처리 문제가 대두되었다고 한다. 지금의 모습에서 소나무가 없어진다면 너무나 외롭고 처량한 신세로 보일까 걱정이 앞서지만, 당국의 현명한 대처 방안을 기다려 볼 수밖에 없다.
 |
동쪽으로 향한 미륵보살을 바위틈새에서 자란 소나무가 파라솔을 바쳐든 듯 덮고 있다. 이들의 조합은 우리가 대조사를 꼭 가보아야 하는 이유가 된다. |